국내동향
2022-10-24
위드유 서울직장성희롱성폭력예방센터 이슈동향 [전문가 칼럼]직장 내 성희롱 피해 산재 인정 좀 더 쉽게, 일터를 포기하지 않게
직장 내 성희롱 피해로 인해 정신적·심리정서적 피해를 입었다면 산업재해 신청이 가능합니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은 직장 내 성희롱을 위험요인으로 보아 산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의 ‘업무상 질병에 대한 인정 기준’을 근거로 산재 여부를 판정하고 있는데요, 시행령엔 업무와 관련해 정신적 충격을 유발할 수 있는 사건으로 발생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우울병 에피소드 △적응장애 등을 질병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신체적 상해를 입거나 우울증 등 심리·정신적 증상이 있으면 직장 내 성희롱의 피해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 과민성 대장염과 같이 신체적으로 전이되는 증상이나 그 외의 다른 피해에 대해서는 인과관계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는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해 겪게 되는 질병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서울여성노동자회는 2015년 직장 내 성희롱 피해 당시 피해자들이 겪었던 증상들을 알아보기 위해 신체반응, 정서반응, 행동반응 및 인지변화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다음은 총 100명의 응답자의 결과입니다.
신체반응에서는 응답자의 64.0%가 수면장애, 45.9%가 두통, 38.0%가 체중감소 및 폭식을 경험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정서반응에서는 응답자의 90.0%가 분노, 90.0%가 수치심, 76.0%가 두려움 및 불안을 경험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행동반응 및 인지변화에서는 응답자의 73.0%가 근로의욕 저하, 49.0%가 자신감 저하, 48.0%가 대인기피를 경험했다고 응답하였습니다.
이 결과는 직장 내 성희롱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분노, 수치심, 두려움, 우울증, 무력감 등의 부정적 감정반응을 강하게 일으키고, 수면장애, 두통 등 신체반응에도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근로의욕 저하, 자신감 저하, 대인기피, 집중력 저하 등 행동 및 인지에도 영향을 주어 직장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부남으로부터 메신저를 통해 음란영상물을 받으면서 경악과 수치심, 당황, 구토, 부끄러움 등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내가 뭐 하러 이곳에 있는지, 왜 사는지’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 내 삶이 너무 천박하게 느껴지고 이런 수모를 당하고 살아야 하나 자책까지 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너무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생리를 하지 않고 있다.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
위 사례처럼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불쾌감, 죄책감, 당혹감, 수치심 등의 심리적 상태가 월경이 멈추거나 하혈을 하는 등 몸이 아픈 신체적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도 흔한 일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가 신체적 전이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산업재해보험 처리를 위해서는 진단서, 병명과 소견서, 진료차트, 상담기록지 등을 근거로 근로복지공단에서 해당 의학과 전문가 자문을 거쳐 결정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판정은 주로 2차 산업 중심으로 다치거나 질병이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질병의 특성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질병의 특성에 맞는 적용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지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 신청은 많지 않습니다.
근로복지공단의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 신청 건수는 2014년 2건(승인 2건), 2015년 2건(승인 1건), 2016년 8건(승인 8건), 2017년 11건(승인 11건), 2018년 13건(승인 13건), 2019년 32건(승인 29건)입니다. 2019년 산재 신청이 총 14만7천여 건인 것과 비교하면 그중 0.021%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희롱 피해가 곧장 질병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산재 신청 건수가 지나치게 적은 것이죠.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산재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경우도 많겠지만, 성희롱이란 사건을 다시 증명해야 하며, 의료 진단서를 제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의 직장 내 성희롱 산재 신청은 정신질환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조사과정에서 가해자, 피해자 모두 조사를 거쳐 성희롱으로 인정되면 판정위원회에서 심사를 거쳐 산재 승인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산재 신청 건보다 3개월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직장 내 징계 절차 자료가 있거나 고용노동부 또는 국가인권위원회 등의 직장 내 성희롱 판정 결과가 있다면 조사절차를 생략하고 빠르게 산재 승인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서울여성노동자회가 2016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해 72%가 6개월 이내에 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정신적 고통뿐만 아니라 고용단절까지 불러올 수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회복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일차적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직장 내 성희롱은 산재로는 인정하고 있지만,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의 재해 유형에는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규정이 신설되면서 산재법에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 질병에 대해 명시가 되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도 피해자들이 퇴사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을 산안법이나 산재법에 재해 유형으로 명시해 노동환경에서 위험요인이 되면, 사업주는 산안법상 예방 조치 의무에 따라 근로자의 안전을 위해 예방 조치를 하는 것처럼 성희롱 예방 노력을 강화하고, 노동자는 성희롱 피해가 발생할 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이 겪는 2차 피해를 막는 효과가 기대된다. “직장 내 성희롱을 사적인 문제로 보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와 문화를 교정하는 데 도움 될 수 있다. 또 노동환경에서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다 쉽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최윤정,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2019)
직장 내 성희롱을 겪게 되면 많은 피해자들이 퇴사를 염두에 두거나, 퇴사를 결심하고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장기간 휴가를 사용하기도 어려우며, 정신적 피해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업주의 의무를 강화하여,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산업재해인정이 더 용이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피해노동자들이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일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 관점에서의 산업재해 인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 본 글은 한겨레21 제 1324호 ‘성희롱 방치 직장은 위험한 일터다’와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 최윤정(2019)를 일부 인용 및 참조하였습니다.
신상아 (서울여성노동자회)